오늘은 을사늑약 110주년이자 순국선열의 날이다. 일본 제국주의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치욕스러운 기억을 독립민주국가를 세우려는 선열의 희생으로 걷어내는 날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두운 심경으로 오늘을 맞이한다.
아베 정권은 식민 지배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며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집단자위권 법제화 등을 포함한 안보법안의 통과를 강행했다. ‘강제된 반성’으로나마 평화국가의 면모를 갖췄던 일본이 이제 군대를 보유하고 외국과의 동맹을 체결해 전쟁에 나서려는 국가가 되었다.
우리 스스로의 모습은 더욱 어둡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도 감히 강행하지 못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다. 다양한 역사 해석에게 길을 열어주고 그 속에서 논쟁과 더 깊은 화합을 꾀해야 할 역사교육이 국가가 권력으로 단일화시킨 일방적인 역사관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군국주의 국가였던 일본보다 식민 지배를 받은 한국이 더 획일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일본의 우익 시민들도 한국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야유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수치에 직면했다.
더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배후에서 추동하는 세력은 일제강점기에 쌀을 공출당한 것을 ‘쌀을 수출했다’고 우기는 자들이다. 옛 제국 군대의 장교는 현 대통령의 아버지라는 특수 지위를 누리며 끝없이 미화되고, 여당 의원의 입에서 버젓이 ‘비밀독립군설’이라는 희대의 거짓말까지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라거나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구호는 온 나라에 가득하지만, 평화와 인권,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치는 차치하고, 역사적인 사실부터 부정당하는 현실 앞에서 남은 건 좁고 얄팍한 반일 ‘정서’ 뿐이며, 일제 청산은 자꾸만 뒤로 미뤄지고 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국 정부는 ‘억지로 체결한 조약’, 늑약보다 더욱 부끄러운 조약을 앞두고 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그것이다. TPP에는 생태 보호나 경제민주주의, 복지, 안전을 위한 정부 규제들이 분쟁 절차에 회부될 수 있는 장치가 있다. 이런 TPP에 가입하겠다는 것은 곧 대자본의 이익 앞에서 시민권을 팔겠다는 이야기다.
또한 TPP로 인해 식량 안전을 위한 주권이 위협받을 것이며 GMO뿐 아니라 방사능 피폭이 우려되는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검역이 약화될 것이다. TPP 가입 조건으로 일본이 후쿠시마 인근 8개현의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해제하라고 요구할 공산도 크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의 요구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스스로 이를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먹을 것을 빼앗기던 시대가 나쁜 것을 받아먹는 시대로 뒤바뀌었다.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 또다시 다짐한다. 국제사회의 시민들과 연대해 일본의 전쟁국가화를 좌절시킬 것이고, ‘개방’이라는 미명 아래 부활하는 침략의 시도에 맞서 시민의 건강과 안전, 권리를 지킬 것이며, 또한 우리 안의 제국주의까지 반드시 타파할 것이다. 동북아 평화를 벼랑으로 몰고 갈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규탄한다! 민주적 다양성 탄압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정부는 당장 철회하라! 주권과 시민권을 팔아먹는 TPP 가입, 반대한다!
2015년 11월 17일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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